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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남은 필름 브랜드의 비밀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남은 필름 브랜드의 비밀

21세기 초, 전 세계의 카메라 산업은 거대한 쓰나미를 맞았다. 이름하여 디지털 전환. 2000년대 초반부터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한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은, 불과 10년 만에 필름 시장을 90% 이상 붕괴시켰다. 수십 년 동안 대중과 전문가 양쪽을 아우르며 사진 산업을 지배하던 필름 카메라는 어느 날 갑자기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많은 필름 제조사는 사업을 접었고, 일부는 파산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브랜드들이 있다. 코닥(Kodak), 후지필름(Fujifilm), 일포드(Ilford), 로모그래피(Lomography).

어떻게 이 브랜드들은 디지털 시대에도 소멸되지 않았을까? 단순히 레트로 감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전략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커뮤니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구축했다. 이 글은 ‘왜 살아남았는가’보다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1. 감성의 상품화: '디지털로는 재현할 수 없는 경험'

살아남은 필름 브랜드들은 단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감성을 상품화했다. 코닥 포트라(Portra), 일포드 HP5+, 후지 프로비아(Provia) 같은 제품은 특정한 색감과 질감, 노이즈와 입자의 감성을 전달한다. 이들은 단순히 사진의 결과물이 아닌, 그 과정을 포함한 일종의 의식이다.

코닥은 자사 필름이 지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조’를 브랜딩 자산으로 활용해 디지털 사진과의 감성 차별화 전략을 취했다. “디지털은 선명하지만, 필름은 기억에 가깝다”는 감성 마케팅이 바로 그 핵심이다.

즉, 이 브랜드들은 제품 자체가 아니라 추억, 유산, 촬영의 리듬과 기다림이라는 요소를 함께 팔았다. 이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기억을 만드는 경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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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산의 전략적 축소와 재조정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자 다수의 필름 브랜드는 ‘확장’이 아닌 ‘축소’를 선택했다. 특히 후지필름은 과감하게 비수익 라인업을 정리하고, 생존 가능한 몇 가지 필름 제품에 집중했다. 이를 통해 생산라인의 효율성을 높이고, 남은 수요를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코닥은 자사 브랜드의 일부를 독립 회사인 '코닥 알라리스(Kodak Alaris)'로 분리시켜, 보다 기민하게 시장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일포드는 필름 생산뿐만 아니라 암실 용품, 흑백 인화지, 화학 약품 등 부속 생태계를 유지하며, 유저들이 '완전히 아날로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보장했다.

이러한 전략적 선택은 단순한 구조조정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정밀한 구조 재설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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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름 커뮤니티’와의 공존: 소비자이자 동맹자

생존한 필름 브랜드들의 또 하나의 비밀은 소비자와의 관계 재정의다. 이들은 구매자를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브랜드 동맹자’로 보았다.

로모그래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브랜드는 자신의 고객들이 직접 제품을 홍보하고, 사진을 공유하며, 문화를 형성하게 유도했다. 사용자가 브랜드의 ‘홍보부’가 되는 구조다. 이로 인해 로모그래피는 단순한 카메라 제조사가 아닌, 서브컬처를 형성한 커뮤니티 브랜드가 되었다.

또한 코닥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해 필름사진 작가들과의 협업을 지속하며 Z세대와의 감성적 접점을 유지하고 있다.

브랜드가 아니라, 커뮤니티가 브랜드를 키워주는 구조. 그것이 이들의 생존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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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디지털 전환의 ‘양면성’을 이해한 기업들

아이러니하게도, 필름 브랜드들의 생존에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크게 작용했다.
후지필름은 사진 필름이 아닌 디지털 헬스케어, 화장품, 산업용 소재 등으로 핵심 기술을 전이시키며, 필름 제조에서 얻은 노하우를 새로운 사업에 확장시켰다.
동시에, 후지는 필름 시뮬레이션(Film Simulation) 기술을 디지털카메라에 탑재해, 자사의 필름 감성을 디지털 세계에 이식하는 전략도 병행했다. 이는 단순한 향수가 아닌, 브랜드 철학의 계승이었다.

코닥 역시 디지털 필름 스캔 장비나 모바일 프린터 등 필름과 디지털을 연결하는 하이브리드 제품군을 통해 생존의 길을 넓혔다. 이처럼, 디지털과의 대립이 아니라 융합적 생존 전략을 택한 브랜드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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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라질 수 없는 이유’가 있는 브랜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브랜드들은 단지 비즈니스가 아닌 문화적 아이콘으로 기능한다. 코닥의 노란색, 후지필름의 그린 패키지, 일포드의 흑백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사진 문화의 언어였다. 이들은 하나의 시대 상징이 되었고, 이는 단기적인 수요 감소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힘이 되었다.

게다가,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필름은 한결같은 매체로 남는다. 이 ‘변하지 않음’은 오히려 오늘날 더 큰 가치로 작용한다. 빠르게 소비되는 디지털 콘텐츠 사이에서 필름은 ‘느리고 유의미한 기록’을 지향하는 철학적 저항이 된다.





결론: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도록 만들었다’

디지털 시대에 필름 브랜드가 살아남은 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제품이 아닌 철학을 팔았고, 감성을 기술로 승화시켰으며, 커뮤니티를 고객이 아닌 동맹으로 대우했으며,
무엇보다도 디지털이라는 흐름을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끌어안았다.

살아남은 브랜드들의 비밀은 단 하나다.
그들은 필름이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문화이자 정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